평화롭고 지루한 오후, 어린 소녀 앨리스는 풀밭에서 흰토끼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이 토끼는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어 보고 잰걸음을 바삐 옮기는데요. 난생처음 보는 이 이상한 토끼를 따라가다 토끼굴에 들어간 앨리스는 낯선 세계로 미끄러져 떨어집니다.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첫 장면입니다. 앨리스는 우연한 계기로 평범한 일상 세계를 떠나 놀라운 판타지 세계 ‘원더랜드’를 모험하게 되는데요. 리디는 매주 토요일마다 시계를 들고 바쁘게 걸음 하는 흰토끼처럼 리디 고객을 판타지 세계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 원더랜드는 바로 ‘밤마녀’ 작가님의 웹툰 ‘다음의 폭군 중 친아빠를 고르시오’인데요. 이 작품은 매주 토요일 리디에서 인기리에 연재 중인 판타지 순정 웹툰입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살아온 ‘천재희’ 박사는 집요한 연구 끝에 과로사로 요절하고, 생전 우연히 정주행했던 로맨스판타지 소설 속 루나 공주로 환생합니다. 그러나 이 공주는 12살에 운명하는 비운의 주인공인데요. 아직 슬퍼하긴 이릅니다. 루나 공주의 친아빠 후보가 무려 4명이거든요. 개성과 매력이 넘치는 것은 당연하고요. 누가 진짜 루나 공주의 친아빠일까요? 그걸 밝혀내면 공주로 환생한 천재희가 12살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는 엔딩을 피해 갈 수 있을까요?
독자에게 끊임없이 궁금증을 유발하며 환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이 작품은 화려한 작화, 개성이 살아있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거기에 회를 거듭할수록 더 다채로운 연출과 설정 제시로 독자를 몰입하게 하는 흡인력까지 갖췄고요.
업계에서는 종종 ‘밤마녀’가 팀 이름이냐는 질문이 들어올 정도라고 하는데요.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며 몰입을 이끄는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방증이죠. 그런데 직접 만나뵙고 보니 여러 명으로 구성된 팀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더 놀라웠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돌아와 독자를 놀랍게 하는 웹툰 ‘다음의 폭군 중 친아빠를 고르시오'(이하 ‘폭군아빠’)을 그리는 밤마녀 작가님을 만나 완성도 높은 웹툰 창작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니
Q. ‘폭군아빠’는 다음 화를 기다리게 하는 매력이 다양한 작품인데요. 화려한 비주얼, 매력적인 캐릭터는 물론 추리의 재미까지 갖췄죠. 일단 제목처럼 루나 공주의 친아빠가 누구일지 궁금하고, 작품 속 여러 의문이 어떻게 풀릴지 궁금해요. 작가님은 이 작품을 어떻게 소개하고 싶으세요?
사실 웹툰 제목이 ‘다음의 폭군 중 친아빠를 고르시오’지만, 사실 제가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바는 친아빠가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보다는 작품 속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이에요. 피가 섞이지 않아도, 심지어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어도 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려고 해요.
스포일러여서 상세하게 설명드리긴 어렵지만 루나 공주로 환생한 인물 ‘천재희’를 포함해 주인공들이 모두 어두운 과거와 상처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사랑을 모르고 자라난 소녀가 (로맨스가 아닌 더 넓은 의미에서의) 사랑을 알아가는 이야기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Q. 처음 작품을 구상하실 때 환생, 육아 소재를 선택하신 이유는요?
최근 인기 작품의 트렌드를 반영하면서도, 엉뚱한 질문으로 제 작품만의 독창성을 더해 봤어요.
작품을 구상하면서 트렌디한 작품을 눈여겨 보고 흐름을 파악했어요. 로맨스가 아니어도 가족 간의 따스한 사랑을 그리거나, 멋진 아빠가 나오는 작품들이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더라고요. 그 흐름을 눈여겨 보다가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럼 멋진 아빠가 네 명이나 있다면 어떨까?” 이렇게 조금은 단순하고 엉뚱한 질문에서 시작하게 된 작품이에요.
밀도 높은 작화의 비결
Q. 주 1회 연재하는 리디 웹툰 ‘폭군아빠’는 특히 밀도 높은 작화가 인상적인데요. 회당 제작 과정, 제작 기간이 어떻게 되나요?
간단히 정리하면 콘티, 배경, 스케치, 선화, 채색, 후보정(및 식자)의 여섯 단계를 거칩니다. 뛰어난 어시스턴트 작가님들이 작업을 든든하게 도와주시고 있어요. 하지만 그림체를 맞추는 과정, 섬세한 추가 묘사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모든 과정이 제 손을 거칩니다.
제작 기간은 총 7일이에요. 콘티에 하루, 나머지 과정에 6일 정도가 소요됩니다. 예상보다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이 정도 소요 시간을 예상하신 분도 있으실 텐데요. 웹툰이 그림만 그리면 완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보정, 배경, 식자, 스크롤 배치 등 눈에 크게 띄지 않는 부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신경 써야 하거든요.
Q. 보정, 배경, 식자, 스크롤 배치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 부분에 신경 써야 하는 이유는요?
일단 보정 과정은 실질적인 완성 원고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단계로, 그림 전체의 밸런스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자세히 말하자면 배경과 인물이 이질적으로 부딪히지 않고 한 화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하거든요. 특히 웹툰 배경은 3D 소스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배경의 색채를 바꾸거나 덧칠을 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만들어줍니다. 또 보정 단계에서 채색을 수정하거나 여러 그래픽 효과를 넣으며 전반적인 퀄리티를 한번 더 끌어올리고 있어요.
또, ‘폭군아빠’는 주인공이 소설 속 판타지 세계로 환생한다는 설정이 있는 만큼 환상적인 느낌의 배경 묘사에 집중했어요. 특히 자연물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요. 작품 속에 나오는 숲 이미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씩이나 그리고 폐기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고요. 독자분들에게 “정말 세계 어딘가에 이런 판타지 세계가 존재할 것 같다”는 느낌을 주고자 합니다.
식자와 스크롤 배치는 웹툰의 내용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챙겨야 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식자는 효과음의 컬러를 내용에 따라 다르게 설정하거나 말풍선의 배치를 신경 써서 장면 장면마다 분위기를 연출하는 동시에 가독성을 함께 챙기고 있고요.
스크롤을 조정하는 과정도 중요해요. 스크롤은 컷과 컷 사이의 시간을 부여하는 과정이거든요. 이를테면 감정을 끌어올려야 하는 장면에서 스크롤 길이가 짧으면 독자에게 그 감정이 전달되지 않아요. 스크롤로 감정이 고양되는 과정을 표현해 줘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집중도가 확 떨어져요. 그래서 이 과정에만 6시간 넘게 투자할 때도 있어요.
Q. 일러스트레이션과 웹툰은 둘 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지만, 제작자 입장에서 느끼시는 차이점이 있을 것 같아요.
웹툰은 연재형 콘텐츠니까 그릴 수 있는 시간이 일러스트에 비해 한정적이에요. 그래서 한 컷 한 컷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퀄리티로 끌어올리기보다는 한 회 모든 컷을 모아보았을 때 전체적인 밸런스를 잡기 위해 노력해요. 그래서 선택과 집중이 중요합니다. 웹툰 한 회 안에서도 정말 중요한 컷에는 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할 수 있도록이요. 결정적으로 독자분들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것은 중요한 컷 하나거든요.
Q. 작업 효율을 높이기 위한 작가님만의 루틴, 작업 비결을 공유해 주세요.
작업에 들어가기 전 캐릭터 설정, 관련 자료를 정리해서 화면에 띄워놓고, 타이머를 켜 둔 후 작업해요. 웹툰은 마감이 정말 중요하니까요. 타이머를 보면서 한 컷에 시간을 너무 많이 들이지 않도록 조절합니다.
처음에는 일러스트만 그리려다 웹툰을 그리려니 적응이 잘 안되어서, 한 컷에 너무 오랜 시간을 쏟은 적도 있었어요. 아까도 전체적인 밸런스를 잡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씀드렸지만, 웹툰은 한 컷만 잘 그리는 게 아니라 전체를 잘 그리는 게 중요하잖아요. 작업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작화 밸런스와 마감을 지키기 위해서 타이머로 시간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독자의 몰입을 이끄는 설정과 연출
Q. 회별 개요나 그림 콘티만 만드신 게 아니라 글 콘티도 거의 소설처럼 읽을 수 있을 만큼 공을 많이 들이셨다고요.
글 콘티를 가능한 상세하게 짜고 다듬는 작업을 오래 했어요. 상세하게 짠 글 콘티가 연재 중에는 그림에 보다 열중하고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기도 하고요.
웹툰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설정을 최대한 풍부하게 만드는 편이에요. 단순한 개요만 잡고 작품 제작에 들어가는 것과, 등장인물이나 세계관의 감정선, 세부 설정을 하나하나 챙긴 뒤에 작품 제작에 들어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글 콘티 내용의 70% 정도가 웹툰으로 표현되고 있는데요. 웹툰에서 표면적으로 담아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컷과 컷 사이에 그 내용이 녹아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독자분들이 웹툰을 감상하실 때도 영향을 줍니다. 글 콘티가 상세할수록 대사나 지문에 들어있는 내용의 밀도도 높아져서,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게 돼요. 그래서 실제로 독자분들이 분량이 많다는 평을 남겨주기도 하셨고요.
연출적으로도 상세한 글 콘티가 큰 도움이 돼요. 저는 ‘폭군아빠’ 한 컷 한 컷을 그릴 때, 최대한 다양한 각도로 장면을 제시하려고 하는데요. 글 콘티로 장면을 상세하게 써 놓고 보면 여러 버전의 연출을 떠올릴 수 있거든요.
Q. 다양한 각도에서 장면을 제시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이건 담당PD님이 말씀해 주신 건데, 제 작품의 강점 중 하나가 자연스러운 동세(인물이 움직이는 모양새) 표현과 다양한 각도에서 그린 컷이기도 해요. 특히 ‘폭군아빠’를 그리면서 과감한 각도의 컷을 많이 시도해 보고 있는데 감사하게도 그 점을 알아봐 주셨죠.
자연스러운 동세, 다양한 각도 표현에 신경쓰는 이유는 웹툰에 담긴 내용을 더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그림이 밋밋하면 그에 따라서 내용도 같이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어요. 반대로 더 생동감있는 표현이나 다양한 각도로 내용을 전달하면 내용도 더 생동감있고 흥미롭게 느껴지고요.
창작 스위치는 항상 ON!
Q. 일주일 동안 주 1회 연재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 바쁘게 일주일을 보내실 것 같아요. 그런 만큼 더 소중한 여가, 휴식 시간엔 무엇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짬이 날 때는 개인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네… 저희 언니도 이 대답에 똑같이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는데요. 기껏 생긴 쉬는 시간까지 왜 그림을 그리느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일로서의 그림과 취미로서의 그림은 저에게는 그 느낌이 달라요.
웹툰은 전부터 제가 너무나도 하고 싶어 했던 작업이고,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임하고 있지만 마냥 즐기면서 할 수만은 없어요. 제가 그리고 싶은 부분만 그릴 순 없고, 그리기 힘든 부분도 작업해내야 하니까요. 비유를 하자면 독서를 좋아하시는 분도 전공 서적을 읽을 때와 읽고 싶은 소설을 읽을 때의 기분은 다르지 않나요? 그런 느낌으로 이해해 주세요.
여가 시간에는 평소에 그리고 싶었던 그림,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의 팬아트를 그릴 때도 있고요. ‘폭군아빠’ 일러스트를 그리는 것도 좋아해요. 지난 만우절에는 ‘폭군아빠’ TS(성별 반전) 버전을 그리고 싶었는데 아쉽게 놓치게 되었거든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그려보고 싶어요.
Q. 작품을 창작할 때 영감은 어디에서 받으세요?
작품 창작에 대한 촉을 늘 세우고 있으면, 제가 보고 듣는 모든 정보가 아이디어로 이어질 때가 있어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만 봐도 놀랄 만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잖아요. 그럼 그 내용을 기반으로 머릿속에서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쳐보는 거죠.
저는 전부터 “판타지란 우리가 어딘가에서 실제로 겪은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란 생각을 해요. 조금 더 큰 범위로 말하면 현실의 일이 이야기의 근간이 된다고 생각해요. 한국 전통 귀신 ‘새우니’ 이야기를 예로 들 수 있겠어요. 이 귀신 이야기는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괴롭힘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에서 파생되었다고 해요.
괴담 중에는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 사회적 약자가 귀신이 되는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그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내몰게 된 죄책감이나 공포감이 귀신에 대한 상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요. 실제 사건으로 인해 생겨난 사람의 감정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판타지도 우리가 언젠가 겪은 일이 시작점이나 기반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Q. 작품을 챙겨보는 리디 독자님들께 한 마디 해주신다면.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너무 뻔하게 느껴지겠지만, 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작품과 함께해 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에 에너지를 얻어 작업할 수 있는 것 같거든요. 지금까지 감사했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Q. 이런 질문 좀 이를 수 있지만 차기작으로 생각해 두신 작품은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액션, 추리 장르를 시도해보고 싶어요. 원래 이 장르를 좋아해서 작업할 때도 관련 영상 작품을 자주 틀어놓는 편이거든요. 생각해 둔 내용도 있어요. 귀신을 볼 수 있는 형사의 이야기예요.
Q. “웹툰 작가”로서 이루시고자 하는 목표,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가요?
당장의 계획은 ‘폭군아빠’를 제 자신이 납득할 만한 퀄리티로 완결하는 거예요.
후회가 남지 않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밤마녀’라는 활동명이 프로젝트 팀이냐는 질문이 왜 나왔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웹툰 작가 밤마녀님은 유쾌한 웃음소리와 활기찬 목소리로 질문마다 꽉 찬 답변을 들려주었는데요. 인터뷰 내내 활기찬 모습만큼 웹툰 창작에 대한 풍부한 열정을 십분 느낄 수 있어 덩달아 에너지를 충전해 갈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께 작가님의 샘솟는 에너지가 전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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