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판타지 웹소설
그리고 ‘육각형 인간’
어느 하나 빠지는 구석 없이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요? 『트렌드 코리아』가 꼽은 2024년의 대세 키워드 중 ‘육각형 인간’이 바로 여기 해당합니다. 외모·자산·집안·성격·학력·직업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간형을 가리키는데요. 특히 노력에 따른 성취 대신 타고난 조건을 갖춘 인물에 열광하는 것이 요즘의 추세라고 해요.
‘육각형 인간’을 선망하는 트렌드는 최근 판타지 웹소설의 흐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현대 판타지의 불문율과도 같은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이 대표적인데요. 별 볼 일 없는 주인공이 고달픈 생을 마감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설정으로, 세계관 최강자의 지위로 단숨에 건너뛰어 승승장구하는 스토리가 많습니다.
이는 ‘노력해도 소용 없다’는 체념에 익숙해진 요즘 시대에 사이다 같은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타고난 조건을 바꾸려면 다시 태어나는 것밖에 방도가 없다는 현실 인식 아래 ‘회빙환’은 현대 판타지의 주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재벌집 막내아들의 어린 시절로 회귀한다거나 눈 떠보니 이(異)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판타지 설정은 흥미진진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꾸역꾸역 현실을 관통하는 판타지가 더 ‘내 이야기’처럼 와닿을 수 있지 않을까요?
‘현생’에서 벗어나는 것 대신 삶의 난이도를 낮추는 설정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현대 판타지 또한 존재합니다. 노력에 만족스러운 결과가 뒤따르고, 진심 어린 꿈과 선행이 인정받는 ‘지금 여기’를 배경으로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공감하기에 충분한, ‘회빙환’ 없는 현대 판타지의 세 가지 매력을 소개합니다.
회빙환 없는 ‘현대 판타지’의 세 가지 매력
첫째, 먼치킨이 아닌 주인공
‘먼치킨’은 현대 판타지 속 전형적인 주인공 캐릭터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약점이 전혀 없어서 그 누구도 대적 못할 세계관 최강자인데요. 하지만 이와 달리 먼치킨이 아닌 ‘보통 사람’의 치열한 도전과 성취를 다룬 현대 판타지 작품도 있습니다.
일례로 웹소설 ‘이과장 생존기‘의 주인공은 그저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빽’도 없는 중소기업 과장에 불과했던 그가 동종 업체로 전직한 뒤 구습을 하나둘 바꾸어나가고 사업을 성장시켜 마침내 기업의 오너가 되기까지 치열한 성공기를 그렸습니다.
평범한 주인공이 회귀나 초능력 없이 온전한 경험과 노력으로 기업을 일으켜 세운다는 이야기가 다소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여정을 따라가는 우리는 오히려 현실과 밀접한 판타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웬만한 먼치킨 회사 경영물 보다 이 소설의 현실 공장 얘기가 더 재밌네요.”, “회귀도 없고 로또도 없고 시력 말고 특별한 능력도 없는데 재밌습니다.”라는 감상평으로 알 수 있듯, 현실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을 통해 ‘나라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되니까요.
둘째, 상상을 강화하는 현실고증
집요하고 치밀한 고증을 통해 주변 현실을 들여다보게 하는 현대 판타지도 있습니다. 특히 주인공의 직업이 전문직이거나 특수직인 경우 잘 알려지지 않은 전문용어, 업계 특성과 분위기, 역사적 사실 등이 작품에 촘촘히 제시되는데요. 특정한 분야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주인공의 독보적인 능력과 시너지 효과를 내는 덕에, 판타지인데도 불구하고 ‘있을 법한’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웹소설 ‘진품명품 천마감정사!‘는 미술품과 유물의 진위 여부를 감별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감정사’의 직업 세계를 그렸는데요. 주인공은 과거의 선행 덕분에 출중한 심안을 갖게 된 ‘먼치킨’에 가깝지만, 단지 그런 판타지적 설정이 전부가 아닙니다. 역사적 인물, 유적지, 화석, 미술품에 얽힌 지식이 세세하고 흥미롭게 기술되어 있어 이야기에 사실성과 깊이를 더합니다.
또 다른 웹소설 ‘눈으로 보는 광고 천재‘는 광고 업계 안팎을 실감 나게 다뤘습니다. “광고계에서 실제로 일하면 어떨지 체험하는 기분이에요.”라는 감상평에 드러나듯, 치밀한 현실 고증 위에 세워진 현대 판타지는 낯선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직업적 탐구을 자극합니다.
셋째, 판타지로 회복하는 인류애
“세상 각박하네”, “돈 앞에 장사 없다더니” 같은 말이 점점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세속적 욕망과 생존주의 앞에서 관용적 태도나 공동체 의식은 자꾸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요? 현실에서 잃어버린 인간성을 과감히 회복하며 따뜻한 감동을 자아내는 현대 판타지가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시골 문방구를 물려받은 ‘골목대장’ 출신 주인공이 추억의 놀이를 매개로 세파에 찌든 재벌 2세들의 동심을 일깨워준다거나(어서오세요 민호문방구), 못 고치는 병 없는 한의사가 침술 하나로 온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는(장침 먹는 깡촌 명의) 등의 힐링물이 여기 해당합니다. 실제로 벌어질리 없는 꿈같은 이야기지만, 독자들은 “내 어릴 때 이야기라서 그런가 잘 보고 있어요”, “실제로도 이런 명의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라는 감상평으로 공감했는데요.
빙의나 환생하지 않아도, 이세계에 뚝 떨어지거나 최강자가 되지 않아도 자신이 가진 역량으로 주변 사람들과 서로 도우며 살아갈 수 있다는 단순한 진실을 일깨웁니다. 우리가 현실에 소망하는 바를 드러내주기도 하고요.
현대 판타지 속 ‘리얼리티’
올초 흥행한 웹소설 원작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을 기억하실 거예요.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서은영 만화포럼위원은 판타지물 ‘재벌집 막내아들’의 리얼리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 바 있습니다.
“(..) 노력의 과정과 성장은 필요치 않다. 그것은 계급사회에서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기에 실현불가능한 판타지일 뿐이라는 인식을 반영한다. (…)”
서은영, 「판타지에서 리얼리티를」,『지금, 만화 vol.10』, 한국만화영상진흥원(2021)
어쩌면 ‘육각형 인간’을 선망하는 현실의 좌절된 욕망이 인생역전을 꾀하는 판타지적 욕망에 투영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판타지의 상상력에 살짝 기대서 더 나은 현실을 앞당길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 아닐까요?
판타지는 환상을 다루는 장르지만,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먼치킨 대신 ‘보통 사람’의 도전과 성취에 주목하는 이야기, 치밀한 고증으로 현실에 밝아지도록 하는 이야기, ‘이곳’에 부재하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이야기가 그저 허무맹랑한 판타지 세계에 머물지 않고 감동을 주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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