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전통 깊은 장르입니다. 이야기가 구전되던 기원전부터 각종 매체가 등장한 현재까지 닳도록 다뤄도 더 선명해지는 테마가 바로 ‘사랑’이니까요. ‘사랑’을 다루는 레시피에는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온갖 희로애락과 딜레마, 아픔과 성숙, 시대와 개인의 한계까지 모두 집어넣고 각기 다른 맛을 내 왔죠.
고전 소설 속
‘남장여자’, ‘집착남주’?
최근 웹툰·웹소설 독자들은 로맨스를 탐색할 때 장르, 캐릭터, 배경 등으로 분류된 키워드를 활용합니다. 주제와 소재를 핵심적으로 드러내는 ‘키워드’는 웹툰에 국한하지 않고 작품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는데요.
실제로 유명한 고전 소설, 희곡 등을 살펴보면 웹툰 주인공에 버금가는 치명적인 집착남이나, 쫄깃한 긴장을 유발하는 남장여자 설정이 등장해요. 200년 전의 ‘집착남주’, 400년 전의 ‘남장여자’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고전’이라는 단어가 주는 위압감에 책장을 펼치지 못하고 망설여왔다면, 오늘은 그 시각을 바꿔볼 기회입니다. 17세기부터 21세기까지 같은 키워드를 공유하는 로맨스 고전과 웹툰을 짝지어 소개합니다.
#집착남주 #피폐물
폭풍의 언덕 vs 반쪽
여자 주인공에게 강한 독점욕과 질투심을 드러내는 ‘집착남주’는 로맨스 웹툰의 인기 키워드죠. 그는 사랑하는 이를 곁에 두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 심지어 제 인생마저 통째로 내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비틀린 운명, 파국으로 치닫는 관계를 그리는 ‘피폐물’이 되기 쉬운 것은 그 까닭인데요. 이처럼 현실에서 만나기 힘든 강렬한 캐릭터와 이야기는 긴 여운을 자아내죠.
‘집착남주’의 대표 캐릭터는 웹툰 ‘반쪽’의 ‘무온’입니다. 그는 황제의 형이자 10년 동안 전쟁터를 떠돌며 귀신이라 불리는 남자인데요. 어느 날 황궁으로 돌아온 그는 황제에게 학대받는 여인 ‘서하’에게 ‘뒷배가 필요하지 않느냐’ 묻습니다. 이건 단순히 황제의 폭력에서 그녀를 구해주려는 제안일까요? 짧은 대사 한 마디, 언뜻 스치는 표정 한 끗 너머 오래 준비해 온 무온의 계략이 조금씩 그 윤곽을 드러냅니다.
19세기 소설 ‘폭풍의 언덕’에도 ‘무온’에 대적할 만한 강력한 ‘집착남주’가 존재합니다. 바로 평생에 걸쳐 ‘캐서린’을 사랑한 ‘히스클리프’입니다. 고아로 태어나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에게 무시당하고 학대받던 그는 시간이 흐른 뒤 막대한 부를 일구어 돌아옵니다.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캐서린과 힌들리를 향해 배신감과 복수심을 불사르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조차 그녀에 대한 사랑과 집착을 놓지 못하죠.
#연하남주 #직진남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vs 태주 동생 태희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오래도록 회자되는 이 대사는 2002년 드라마 ‘로망스’의 한 장면입니다. 대사와 더불어 순정 연하남 주인공 역시 대중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죠. 그밖에 풋풋한 얼굴로 “누난 내 여자”라는 당돌한 고백을 던지며 시대를 풍미한 가요도 있었고요. 이처럼 평소엔 순정적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당돌하게 직진하는 반전이 바로 연하남의 매력일 텐데요.
웹툰 ‘태주 동생 태희’에서 주인공 ‘강우’에게 직진하는 ‘태희’는 순수하면서도 저돌적인 연하남의 매력을 잘 갖춘 캐릭터입니다. 강우는 결혼식 당일 예비 신랑의 바람이 탄로 나며 최악의 파혼을 맞습니다. 절친 ‘태주’의 집에서 분을 삭이던 중, 우연히 태주의 동생 ‘태희’를 맞닥뜨리는데요. 그는 귀여운 대형견처럼 살갑고 애교스럽게 강우를 졸졸 쫓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듬직한 모습으로 강우의 전남친을 퇴치하고 조용히 위로까지 건넵니다. 강우는 태희를 절친의 남동생으로만 보려 하지만, 넘치는 반전 매력이 자꾸만 강우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60년 전에도 연상녀의 마음을 거칠게 뒤흔든 연하남이 있었으니, 바로 1950년대 출간된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시몽’입니다. ‘로제’와의 권태로운 연애를 이어가던 39살의 실내 장식가 ‘폴’에게 25살의 변호사 ‘시몽’이 다가옵니다. ‘시몽’은 폴에게 계속 거절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직진하죠.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에서 폴은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폴의 선택을 두고 다양한 감상을 남길 만큼, 시몽은 순정 연하남의 정석으로 독자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요.
#서간체 #첫사랑
키다리 아저씨 vs 답장을 주세요, 왕자님
편지는 수신인이 특정된 사적인 글입니다. 그런만큼 진실되고 내밀한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죠. 편지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 관념은 ‘서간체’로 쓰인 이야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편지 형식의 이야기를 접한 독자는 등장인물에게 금세 친밀감을 느끼고, 이야기에 깊이 몰입할 수 있는데요.
웹툰 ‘답장을 주세요, 왕자님’은 서로 다른 시공간을 잇는 서책 보관함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는 두 주인공의 사랑을 담아냅니다. 신입 출판 편집자 코델리아는 유명 동화의 후속 원고를 받으러 찾은 골동품점에서 서책 보관함을 얻는데요. 그안에서 원고 속 인물 ‘아치’ 왕자가 보낸 편지를 발견합니다. 정작 보관했던 원고는 사라지고요. 이 일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서책 보관함을 통해 여름밤 내내 필담을 나누다 사랑에 빠집니다. 얼굴도 모르는 채 서로를 그리는 설렘으로 잠 못 이루는 두 사람의 마음이 편지 속에 진하게 녹아 있어요.
소설 ‘키다리 아저씨’는 ‘주디’라는 소녀가 보낸 편지로 이뤄져 있어요. 편지의 수신인은 단 한 명, 그녀를 대학에 보내 준 익명의 후원자 ‘키다리 아저씨’뿐인데요. 주디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후원자에게 대학 생활 내내 답장 없는 편지를 보냅니다. 새롭게 배운 것을 자랑하고, 상상으로 ‘키다리 아저씨’의 초상을 그려 보내고, 가족이 없는 외로움을 토로하며 답장을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합니다. 마지막 편지는 주디의 첫 번째 연애편지이기도 한데요. 주디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한 편지글 속에서 순수하고 풋풋한 설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남장여자 #엇갈림·오해
십이야 vs 참아주세요, 대공
웹소설 기반 웹툰 ‘참아주세요, 대공’의 주인공 ‘카닐리아’는 ‘카닐리언’이라는 이름으로 남장을 강요받습니다. 후작가의 차기 후계자 ‘키에런’이 병약해지자, 사생아 카닐리아가 둘째 아들 노릇을 하게 된 것인데요. 그런데 이하르 공작가의 후계자 ‘클로드’는 카닐리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한 호기심을 느낍니다. 여자임을 숨긴 카닐리아, 그녀가 여자임을 모르는 채 끌려드는 클로드, 이 둘 사이에 카닐리아의 정체를 알아챈 왕자 ’이안’이 등장하면서 이들 사이의 긴장은 더욱 팽팽해집니다.
셰익스피어 5대 희극 중 ‘십이야’의 여주인공 ‘비올라’는 ‘세자리오’라는 이름으로 남장을 하고 ‘오시노’ 공작의 몸종으로 들어갑니다. 난파선에서 실종된 쌍둥이 오빠를 찾기 위해서인데요. 공작은 세자리오를 보내 ‘올리비아’에게 구애하지만, 그녀는 도리어 세자리오에게 홀딱 반해버려요. 그런데 사실 세자리오는 오시노 공작을 연모합니다. 밝힐 수 없는 비밀과 엇갈리는 감정 사이에서 비올라의 오빠 ‘세바스찬’이 나타나며 상황은 점입가경이 되는데요.
남장여자라는 비밀 때문에 겪는 오해와 딜레마, 복잡하게 얽힌 관계도는 400년 이상 흐른 지금 읽어도 그 재미가 바래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주인공이 여자임을 들키지 않을까 숨죽여 지켜보는 한편, 그 비밀로 인해 꼬여가는 상황에 답답함, 조바심을 느끼며 이야기에 몰입하죠. 실제로, ‘십이야’의 유쾌한 리메이크 버전인 영화 ‘쉬즈 더 맨 (2006)’은 남장여자 하이틴 로맨스의 대표작으로도 손꼽히며 큰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멀고도 가까운 로맨스
같은 장르와 키워드를 공유하는 작품이라도 변화하는 시대의 가치관, 매체, 문화권에 따라 내용과 표현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로맨스는 하나의 핵심을 공유합니다. 바로 권태로운 주인공의 세계를 깨부수는 힘도, 온갖 장애물을 뛰어넘어 서로에게 달려가게 하는 힘도 모두 ‘사랑’이라는 것이죠.
오늘 소개한 작품들 역시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이 핵심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셨을 거예요. 오늘은 고전과 웹툰에 대한 우리 안의 ‘오만과 편견’을 뛰어넘고, 사랑에 푹 빠져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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