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물, 요즘 인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1990년대 인기 만화 ‘슬램덩크’는 2023년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로 약 30년 만에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일견 이례적이지만 맥락은 있습니다. 예능·드라마·에세이·웹툰 등 매체를 불문하고 화제를 모으는 스포츠물이 최근 몇 년간 꾸준히 등장해 왔거든요.
코미디언 김민경의 운동 도전기 예능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은 사격 국가대표 선발로 큰 화제를 모았죠. 한편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예능 ‘골때리는 그녀들’은 여자 축구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켰고요. 70대 노인의 발레 도전기를 담은 웹툰 ‘나빌레라’는 국제적인 만화 상인 아이즈너 상에 후보로 오르기도 했습니다.
스포츠물에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스포츠를 가리켜 각본 없는 드라마라 일컫곤 합니다. 한계와 편견을 넘어선 뜻밖의 승부, 마지막 한 방울의 열정까지 털어 넣는 투혼이 희망과 감동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2022년 대표 유행어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는 기나긴 팬데믹을 거쳐 고달픈 시기를 마주한 우리에게 스포츠가 안겨주는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음을 말해줍니다. 스포츠물의 핵심 가치와도 일맥상통하죠.
스포츠물 속 주인공은 주어진 한계, 세간의 편견 앞에 가로막히지만 목표를 향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편견은 사뿐히 지르밟고 한계를 돌파할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성장해나가죠. 이 과정에서 동료들과 진짜 한 팀이 되기 위해 갈등하고 경쟁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서로를 받아들이며 단단히 다지는 팀워크 역시 스포츠물의 묘미고요.
‘여자축구’부터 ‘슬램덩크’까지
동명의 에세이를 각색한 웹툰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는 편견에 꺾이지 않고 피치(축구장)를 누비기로 한 평범한 여성의 축구 도전기입니다. 주인공 ‘피어난’은 어느 날 여자 축구단 ‘FC 불꽃’ 감독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습니다. 혼자가 편했던 어난에게 팀 스포츠인 데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축구는 부담 그 자체였죠. 하지만 축구공을 발로 찬 순간 짜릿한 감각을 느낀 어난은 축구에 눈뜨게 됩니다.
그런데 ‘여자가 축구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모두에게 생소한 모양입니다. 실력이 빠르게 늘지 않아 팀에 누가 된다는 조바심도 어난의 발목을 붙잡고요. 그럼에도 어난과 ‘FC 불꽃’팀은 절대로 피치를 떠나지 않습니다. 대신 달리고 밀치고 소리치며, 피치 안팎에서 들리는 ‘여자가 무슨 축구’ 같은 납작한 편견의 머리꼭대기를 우아하고 호쾌하게 뛰어넘어 갑니다.
웹툰 ‘청의 마운드’는 서로 다른 단원들이 진짜 한 팀이 되는 과정을 담아냅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대학생 ‘한새봄’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잊고 살던 야구에 대한 그리움으로 야구단을 찾아옵니다. 다른 단원들 역시 각자의 사정을 품고 있고요. 그렇기에 야구의 의미도 서로 다른데요. 유일한 해방구로서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리하게 일을 하면서까지 시간을 내어 임하는 사람도 있죠. 각자가 가진 능력과 조건이 달라 생기는 차이가 갈등을 빚어내기도 하고요.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단원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야구를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단원들은 좋아하는 야구를 더 잘 하기 위해 서로의 빈틈을 메우며 성장해 나갑니다. 이를 통해 야구가 한 명이 아닌 아홉 명이 한 팀을 이루는 스포츠인 이유를 몸소 깨달으며 진정한 한 팀으로 거듭나 갑니다.
만화 ‘슬램덩크’는 주인공 ‘강백호’가 별 관심도 없던 농구에 빠져들며 진짜 ‘바스켓맨’이 되는 성장기입니다. 백호는 어느 날 “농구 좋아하세요?”라고 묻는 소연에게 반해, 해본 적도 없는 농구부에 덜컥 들어갑니다. 처음엔 소연이 짝사랑하는 농구부 루키 ‘서태웅’을 라이벌 삼아 시종 티격태격하고, 팀플레이는 안중에도 없고 돋보이고만 싶어 하죠. 하지만 점차 농구에 진심으로 빠져들며 태웅을 비롯한 모두와 한 팀으로 경기에 임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한편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만화의 조연 ‘송태섭’입니다. 점프와 몸싸움이 많아 큰 키가 유리하다는 농구에서 168cm에 불과한 그의 키는 한계이자 편견으로 다뤄집니다. 재능 있는 농구 선수였던 형의 그림자 역시 그를 억누르는 편견으로 작용하고요. 태섭은 골리앗 같은 ‘산왕공고’와의 대결에서, 한계라고 여겨진 자신의 신체 조건으로 산왕의 ‘존 프레스’(압박 수비)와 편견의 벽을 동시에 돌파해 나갑니다.
스포츠물이 되새기는
과정의 가치
스포츠물과 현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모든 결말이 성공이나 승리로만 끝나진 않는다는 것이죠. 기적적으로 ‘산왕’을 꺾은 ‘북산’이 그다음 경기에선 거짓말처럼 참패한 것처럼요.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스포츠물의 또 다른 주제가 드러납니다. 어떤 결과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열정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스포츠물은 경기 장면만큼이나 선수들이 고군분투하며 목표를 향해 달려오는 과정을 공들여 담아냅니다. 이들이 최선을 다했음을 알기에 결전의 순간 눈을 떼지 못하고 자기 일처럼 몰입하게 하고요. 동시에 결과만을 놓고 이들의 기나긴 이야기를 ‘성공’이나 ‘실패’만으로 납작하게 눌러버리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든 사회적인 성취든, 우리는 결과만 보고 과정은 놓치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과정이 얼마나 진실되었든 결국 결과로 증명해야 하죠.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과정을 소중히 하자는 말은 언뜻 순진해 보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지난한 과정과 찰나의 결과를 되풀이하며 사니까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과정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스포츠물이 지금 사람들의 마음속을 더욱 깊게 파고드는 이유와도 맞닿아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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