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19세기 소설에서 모티브를 따 온 드라마 ‘작은 아씨들’,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이슈를 모은 소설 ‘파친코’와 ‘하얼빈’까지. 2022년 들어 최소 한 번쯤은 제목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화제를 불러 모은 이 인기작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고전과 역사를 그대로 옮기기보다 적극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인데요. 막연하거나 뻔하다고만 알고 있던 고전, 역사를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은 우리에게 반가움과 신선한 흥미를 일으킵니다.
웹툰으로 환생하는 우리 고전 · 역사
드라마, 소설뿐만 아니라 웹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전과 역사의 과감한 재해석 시도가 늘어나며 빛을 발하는 작품들이 속속 탄생하고 있는데요. 단적인 예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선정하는 ‘오늘의 우리만화상’ 선정작을 살펴볼 수 있어요. 2010년대 후반, 정확히는 2018년부터 ‘그녀의 심청’, ‘정년이’, ‘고래별’, ‘신의 태궁’ 등 5년 연속 우리 고전·역사를 활용한 웹툰이 꾸준히 선정되며 작품성과 화제성을 입증했습니다.
옛이야기인 고전·역사와 21세기 태어난 새로운 매체 웹툰은 견우와 직녀처럼 멀리 떨어진 사이 같습니다. 하지만 풍부한 상상력과 능동적인 재해석을 오작교 삼아 과거와 현대의 벌어진 틈을 잇고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어요.
왜 웹툰일까?
특히 웹툰에서 고전과 역사의 적극적인 재해석이 이뤄지는 배경은 무엇일까요?
여타 디지털 콘텐츠의 제작 방식처럼, 웹툰은 다채로운 원재료를 모아 그대로 덧붙이기보다 자유롭고 과감하게 가공하고 재배치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냅니다. 고전과 역사를 포함해 매체 불문 인기작, SNS를 달군 밈(Meme), 괴담 등 다양한 콘텐츠가 모두 웹툰의 원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웹툰이 10대와 20대를 주요 독자층으로 두는 동시에 쌍방향 소통이 보편화된 매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10대와 20대의 60% 이상이 최근 일주일 내 웹툰 이용 경험이 있다고 답할 만큼*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콘텐츠입니다. 작품에 대해 의견과 감상을 표현하는 것 역시 웹툰 감상의 일부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댓글과 리뷰가 활발히 이뤄지고요.
*오픈서베이, 웹툰 트렌드 리포트 2022
그래서 기존 내용 그대로 고전과 역사를 재현하기보다,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시각에 맞춘 적절한 재해석이 이뤄질 때 더 큰 공감과 호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선녀의 옷을 훔쳐 혼인에 성공한 나무꾼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시각이 과거와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요.
웹툰이 고전 · 역사를 재해석하는 방법
웹툰이 고전·역사를 재해석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이 글에서는 대표적인 세 가지 유형을 사례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빈 틈 메우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기록은 그 부분만을 담게 됩니다. 이렇게 쌓인 역사 속 기록 한 줄, 그림 한 장은 후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데요. 이를 단초 삼아 상상력을 덧붙여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죠.
웹툰 ‘조선열혈독녀단’의 첫머리는 태종실록 속 ‘독녀(獨女)’에 대한 기록 한 줄로 시작합니다. 여러 이유로 남편이 없는 여성들을 조선에서는 ‘독녀’라고 일컬었는데요. 이들은 온전치 못한 존재 취급을 받으며 편견에 시달리는 한편, 구휼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독녀’라는 두 글자 뒤에 가려져 있던 여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서로 다른 이름과 얼굴을 가진 주인공들로 그려냈어요.
또 다른 사례는 동명의 소설을 옮긴 웹툰 ‘능소화’입니다. 1998년 4월 경북 안동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원이엄마 편지’에 상상력을 붙여 재탄생시킨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인데요. 특히 이 웹툰은 영문으로 번역돼 글로벌 웹툰 서비스 ‘만타(Manta)’를 통해 전 세계 독자를 만났습니다. 400여 년 전 조선 여인의 이야기가 소설로 또 웹툰으로 새롭게 재탄생해 국경 너머 글로벌 고객을 만나게 된 것이죠.
2. 서로 다른 이야기의 유기적 결합
앞서 웹툰은 다양한 콘텐츠를 원재료 삼아 가공하고 재배치하는 디지털 콘텐츠의 특성을 가진다고 소개했는데요. 이처럼 서로 다른 고전, 역사 속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천만 관객이 찾은 영화로도 각색된 인기 웹툰 ‘신과 함께’는 ‘차사 본풀이’, ‘문전 본풀이’, ‘천지왕 본풀이’ 등 제주의 대표 신화들을 기반으로 방대한 세계관을 그려냈습니다. 한편 2018년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작 ‘가담항설’은 “고전 시가를 소재로 말과 글의 힘, 인간의 이성과 감정, 삶의 불행과 고통, 그리고 정의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한시나 시조 등 다양한 고전 시가·운문이 작품에 인용되며 인물의 성장, 에피소드 전개를 이끕니다.
*랑또, 웹툰 ‘가담항설’ 174화 후기
해치는 선악을 구별하고 재앙과 화재를 막는다는 전설의 동물입니다. 이 때문에 화재에 취약한 궁궐, 이를테면 경복궁에서 해치상을 발견할 수 있죠. 웹툰 ‘메롱해치, 궁녀를 부탁해’의 주인공 ‘메롱해치’는 이 경복궁 영제교의 서수*상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캐릭터입니다. 여기에 궁궐의 곳곳과 생활을 기록한 다양한 기록물을 반영하며 궁녀, 세자, 공주 등 크게 조명 받지 않았던 인물들의 삶의 모습을 전합니다.
*서수: 상서로운 짐승
3. 시점 비틀기
시대와 관점의 변화에 따라 하나의 이야기는 새롭게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일례로 웹툰 ‘그녀의 심청’은 이야기가 서술되는 시점을 바꿔 흔히 효녀의 이야기로 읽히던 ‘심청전’을 재기 발랄하고 비판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심청과 더불어 조연 장 승상 부인, 뺑덕 어미를 주인공으로 끌어올린 것인데요. 심청은 예쁘고 불쌍한 효녀가 아닌 삶에 짓눌린 비렁뱅이, 장 승상 부인은 신분 규범에 억눌린 상류층, 뺑덕 어미는 그 규범의 굴레를 탈피한 여성으로 묘사됩니다.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점차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고전과 역사에서 재발견하는 이야기의 힘
웹툰 외에도 우리 시대의 새로운 콘텐츠 매체에서 고전·역사의 재해석은 계속됩니다. 리디의 단편소설 시리즈 우주라이크소설을 통해 공개된 곽재식 작가의 단편 소설 ‘이상한 목랑 이야기’, 조선시대에 그려진 ‘강산무진도’, ‘시왕도’ 등의 그림에 이야기를 덧붙인 디지털 실감 전시 등이 바로 그 예시이고요.
현대적 시각과 새로운 기술이 덧붙여지며, 고전과 역사가 품은 이야기는 끝없는 생명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에 기반한 새로운 콘텐츠는 고전과 역사가 가진 이야기를 기반으로 너른 상상력을 뻗어낼 추진력을 얻고요.
고전과 역사가 품고 있는 이야기로서의 가능성은 앞으로 더 많이 꽃을 피울 것입니다. 박제된 옛것으로 남아있기보다 생생한 모습으로 우리의 곁에 다가올 오래되고 새로운 이야기를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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