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딘의 어깨 위에 앉은 이야기꾼, 휘긴
홍정훈 작가는 90년대 후반부터 활동한 1세대 판타지 작가 중 한 명입니다. ‘휘긴경*’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죠. PC 통신으로 연재 소설을 읽던 때부터 스마트폰으로 웹소설을 읽는 지금까지, 그는 무려 26년이라는 시간 동안 작가로 활동해 왔습니다.
*북유럽의 신 ‘오딘’의 어깨 위에서 세계의 정보를 전하는 까마귀 ‘후긴’에서 따 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022년, 휘긴경은 오랜만에 정통 판타지 ‘영혼없는 불경자의 밤’으로 귀환했습니다. 진한 정통 판타지를 오랜 시간 푹 고아 만든 듯한 이 작품은 뜻밖에도 PC 통신 세대는 물론 스마트폰 세대까지도 모두 한데 불러모았는데요. MZ 세대 비중이 가장 높은 리디 판타지 웹소설 독자들 사이에서 줄곧 정통 판타지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영혼없는 불경자의 밤’은 작은 인간이 거대한 악 앞에서 영웅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아자딘’은 모두가 경멸하고 혐오하는 불가촉 천민 부족 출신 중에서도 최악의 저주를 안고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천대받던 약자가 도무지 이길 수 없을 만큼 강한 악 앞에 대항하는 이야기는 시대와 유행을 초월해 독자의 마음을 끓어오르게 하는데요.
아자딘은 부당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가 하면, 평생을 두고 반성하라며 적을 불구로 만들기도 하는 독특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독자들 사이에선 ‘거세킹’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는데요. 아자딘을 비롯한 인물들의 거침없는 언행, 피와 살이 찢기고 튀기는 액션 씬을 보고 있노라면 짜릿하고 시원한 쾌감마저 듭니다.
작품만큼이나 거침없고 시원시원한 입담의 홍정훈 작가님께 이번 작품과 작가 활동에 대해 물었습니다.
반갑게 혹은 신선하게
’영혼 없는 불경자의 밤’
Q. 요즘 신작 웹소설로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정통 판타지 풍의 작품이라, 독자에게 오히려 신선하고 새로운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고전적인 게 워낙 없다 보니 옛날 스타일이 새롭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상당히 오래 전부터 구상하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만큼 요즘 감성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문제였지요. 과거 단행본 시절에는 호흡이 한 권 단위로 맞춰져 있어서 대체로 심한 역경이 나와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어요. 반면에 연재 웹소설은 한 편 단위로 맞춰져 있어서 너무 잔혹하거나 답답하면 하차한다는 피드백이 즉각적으로 날아오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여건이 된다면 긴 호흡을 가진 고전적인 판타지를 쓰고 싶었는데, 마침 리디에서 제안이 들어와 기쁜 마음으로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Q. 어떤 작품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구상해 오신 이야기인지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초인성’을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아메리칸 코믹스의 히어로처럼 날아다니고 눈에서 빔 쏘는 초능력이 아니라 광야의 초인, 위버멘쉬, 절대정신, 그런 면의 초인성이지요. 그 반면에는 인간의 범속함을 증오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초인성을 지향하더라도 평범함을 벌하면 안 되는데, 저 역시 범속한 인간인지라 남을 쉽게 미워하고 나 자신을 포함해 인간의 범속함을 증오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이번 ‘영불밤’의 테마는 ‘믿음’으로 하고 싶습니다. 나 자신에게는 믿음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 싶으니까. 일종의 마음 수양이지요.
가혹한 환경과 세상 속에서 그래도 구원은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주인공의 여정을 그리면서, 저는 매 순간 약간의 구원을 얻기도 하지요. 이번 신작 『영혼 없는 불경자의 밤』처럼요.
‘영혼없는 불경자의 밤’ 작가의 말 中
Q. ‘영불밤’에서 새롭게 시도하신 것이나 개인적으로 도전이었던 부분은 무엇인지요?
개인적으로 도전인 건 이 작품이 2부 구성이라는 점입니다. 상업소설에서 2부 구성은 위험 부담이 있지요. 지금 빵 터트릴 수 있는 화끈한 떡밥을 굳이 후반부까지 안고 가는 거라서요. 도중에 인기 떨어져서 조기종결 당하면 떡밥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래도 작품이 워낙 고전적인 컨셉이라 2부로 구성했습니다. 표지에서 묘사된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아자딘에겐 눈이 없어요. 하지만 2부에서는 변화가 생길 겁니다.
Q. 작가님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캐릭터·설정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쭉 공통적으로 밀어온 요소라면 무예 능통 정도군요. 기본적으로 저는 액션 영웅 서사의 등장인물은 다들 어느 정도 자기 단련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막상 제 작품을 보면 ‘어느 정도’가 아니긴 하지만.
그 밖에 요새 관심이 있는 테마라면 ‘위대한 선택’이지요. 평소에 술 먹고 개차반이던 사람이 화재 현장에 뛰어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조한다든가. 인간의 평가가 한 순간에 엇갈릴 만한 선택의 순간을 많이 보고 싶고, 만들고 싶습니다.
26년 창작의 지구력
Q. 시대와 매체의 변화를 작가로서 직접 경험하셨을 텐데요. 작가 생활의 중요한 전환점이 언제였는지, 또 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단연코 중요한 건 웹소설 연재 매체의 등장이지요. 일단 벌이가 늘어서 생활이 되잖아요. 각계의 인재들도 유입되고요.
과거 단행본 시절에는 독자와 작가 사이에 좋게 말하면 완충장치가 많았어요. 글을 잘 쓰기보다 빠르게 많이 쓰면 되었고 독자들의 선호나 경향성에 따르기 보단 자유롭게 팍팍 써도 무방한 시절이었죠. 그런데 이젠 독자가 직접 ‘돈쭐’을 내주기도 하고 작가의 버릇을 고치기도 하니, 엄청난 변화지요.
상업소설은 결국 독자가 있어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의 취향을 무시할 수 없어요. 그 힘이 너무 강해져서 작가의 광기에 가까운 독자성이 깎여 나가는 건 아쉽지만, 미친놈은 그 안에서도 미쳐 있는 법이라 악영향보다는 순기능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Q. 판타지를 포함한 모든 장르의 웹소설 트렌드가 굉장히 빠르게 바뀌는 것 같습니다. 장르소설의 트렌드에 대한 작가님만의 시각이 궁금합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트렌드를 기민하게 감지하진 못합니다. 트렌드를 잘 감지하는 동료 작가들과 교류하며 조언을 듣지요. 저만의 시각이라면 트렌드랑 동떨어진 소리를 해야 하는데….
어쨌든 이 장르의 트렌드에 대해서 말하자면, 너무 경시하지도 너무 끌려다니지도 말자는 거죠. 트렌드는커녕 기본 형식마저 전혀 지키지 않아서 ‘입구컷’ 당하는 경우가 있어요. 반대로 트렌드 연구에 너무 심취하면 글을 시작하다 접기를 반복하고 연구만 계속하는 ‘내글 구려 병’에 걸리기도 쉽지요. 그냥 인생 좀 대충 살겠다는 각오가 필요한 것 같아요.
Q. 미출간 작까지 포함해 서른 종 넘는 작품을 선보이셨어요. 창작을 위해 꾸준히 하시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일종의 ‘맨 워칭’ 이지요. 어떤 사람을 찾아서 이 놈이 왜 이럴까, 왜 이런 생각을 하며 그 배경은 뭘까를 궁리해봅니다. 일본 만화 등에서 ‘서로를 이해하면 평화가 찾아온다’ 같은 소리도 하지만 사실 서로를 이해하면 그 영혼의 밑바닥까지 혐오할 수도 있게 되지요. 사람은 정신적 지층이 다르면 정신세계가 너무 달라져요. 적극적으로 내 지층 아닌 곳의 인간들을 탐구해야 합니다.
광기와 보편성 사이의 글쓰기
Q.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독자 피드백이 궁금합니다.
처음 PC 통신에 소설을 연재할 때 독자의 질문이 있었지요. “아니 아무리 회복 마법이 강한 세계관이라지만 다들 팔다리, 눈알 날아가도 눈 깜빡 안한다.” 제 대답은 이랬어요. “저는 팔다리 날아갔다고 패닉 일으키는 정도의 놈들은 살려두고 싶지 않다.”
만화 ‘블랙잭’을 보면 오지에서 거울보고 자기 스스로 개복 수술하는 장면이 있어요. 모든 인간이 저정도는 해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좀 돌았구나’ 싶더라고요. 초인성에 대한 제 집착을 자각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Q. 마지막으로 작가님께 글쓰기와 독자는 어떤 의미·존재인지요?
제게 있어서 글쓰기란 저 자신의 광기와 보편성을 조율하는 일종의 마음 수양 작업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공감 받고,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비열한 욕망이 가득하지요.
결국 상업 예술은 독자가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니, 여러분들 덕분에 제가 글 쓰고 삽니다. 아니었으면 진짜 베링 해에 게 잡으러 갈 뻔.
흔히 시원하고 막힘없는 전개를 두고 ‘사이다’라고 하죠. 문제는 빠르게 해결되고, 주인공은 상대가 모르는 뜻밖의 와일드카드를 쥐고 있습니다. 꽉 막힌 현실에서 시달리던 독자들은 이런 ‘사이다’ 이야기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고요.
‘영혼없는 불경자의 밤’에도 ‘사이다’는 있습니다. 가진 것 없는 주인공이 넘기 어려운 역경 앞에 넘어지고 구르는 모습은 ‘고구마’에 가까울지 몰라도, 묵묵히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역설적으로 가슴 속이 시원해 지거든요. 26년 내공으로 빚은 깊고 진한 홍정훈 작가님 표 ‘사이다’를 만끽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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